Madey
24살 7월 본문
1.
아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냐면
싫은거 안하고 그냥 하고싶은 일만 하고싶은 생각만 하고 사는데,
그냥 난 커피가 좋고 맨날 책읽고 일어나서 책읽을 생각하고 밥먹고 책읽고 자기 전까지 책을 끼고 사는데 책 읽으면서 좋아하는 구절 다시 읽으면서 피는 담배가 그렇게 맛있고 운동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내가 좋다.
머리 감고 나와서 에어컨 틀고 바로 머리 말리려다가 잠깐 소파 앉았는데 책 집어들고 졸다가 결국 머리 못말려서 꿍 해있다가 스르르 잠드는데 그게 좀 미칠거같다.
요즘 새벽에 자꾸 깨는데 그러다가 또 책읽고 책읽다가 인스타 하는데 재밌는거 발견해서 전시 예약하고 재밌는 글 읽고 쓴 사람 찾아내서 그 사람 책 또 읽고 아 그냥 책만 읽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생각하다가 그런 책을 또 만나고 싶고 그래서 계속 계속 읽고 읽고 또 읽고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맨날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나한테 좋은 사람 너한테 좋은 사람 너희들한테 좋은 사람? 그냥 걷다가 땅바닥에 어깆어깆 푸르고 굳세게 피어나는, 어이없게도 잡초라고들 불리우는 꽃들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 긍정적인 것을 우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긍정에 익숙한 사람. 모호한 걸 좋아하고 모순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울 할머니랑 강아지 제일 좋아함. 사랑해.
오늘 엄마보고 오는 길에 휴가철이라 그런지 도로 위에서 한숨쉬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빠는 굳이 굽이굽이진 시골길을 모험하는 선택을 했는데 시간은 늘어났어도 할머니의 몇마디들에 내 마음이 울망 녹아서 좀 행복했다. 나는 감상에 젖은 할머니의 말들이 좋다. 시골 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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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냄새가 나네 그려,
옥수수가 피었네!
해바라기 핀 것 좀 봐,
곤하게 잠이나 자고 싶어라~
나무밖에 풍성하게 자라는게 없어, 지 잎새귀가 떨어지더래두 다시 또 자라는겨.
이야, 호박 잎이 저렇게 멋있냐! "
" 할머니는 산을 더 좋아하나보네? "
" 산은 모기랑 뱀이 무섭고, 바다는 좋은데 막연한거여. "
" 막연하니까 좋은거지. "
" 그러니께 이런거 보면 예담이는 다 큰겨, 너 나이니까 그런게 좋은 것이지. 나이들면 무서운게 많아지니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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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니까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한없이 냉정한 적이 없는 할머니의 따듯함이 좋다. 여든이라는 숫자와 우리 할머니를 한번도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한 적도 없다. 지금 쓰고 있는데 거의 처음 생각하는 정도로. 할머니는 젊어서 10살 차이나는 틀딱과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결코 할아버지의 시간에 녹아든 적이 없다. 할머니와 닮은 구석을 내안에서 발견할 때마다 나는 환호한다. 사랑한다. 내가 어떤 순간에서라도 환대하는 나의 할머니. 구찌와 나이키가 잘어울리는 하헌숙씨.
2.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The cell (2000) 이라는 영화인데 나랑 동갑이라 내가 좀 들이댔다. 19살 때 처음 반했는데 얘는 잊지도 않고 이번에는 나한테 찾아와서는. 아, 시간이 지날 수록 느껴지는 것이 다르다고 했던가 얘가 나한테 그런 존재다. 솔직히 나는 우울이 어떤 깊은 내면의 실상같아서 좋아하곤 하는데, 누군가의 우울과 고통의 시작과 끝을 지켜보는 기묘함이라니 하면 안되는 것을 몰래 하는 느낌처럼 조금 흥분되기도 하고. 그게 심지어 살인마의 심리를 보는거라서 더 기묘했다. 감독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오마주 하는 씬들도 너무 좋고, 그 작가들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스토리도 참 좋았다. 5년 전의 느낌과 24살의 내가 느껴지는 것들이 많이 달라서 그만큼 내가 변하기도 했구나 싶기도 했다. 이 영화와 관련해서 내가 느낀 것들은 따로 한번 더 기록해야지. 웅 그랬다.
3.
책을 읽었다. 선물받은 책인데, 두께가 좀 되는데도 삼일만에 끝나버렸음. 스스로에게 간절한 자비를 구하는 고통받는 환자 5명이 나오는데, 어떻게보면 되게 무거운 주제임에도 작가가 설정한 '이라부'라는 정신과 의사가 너무 귀엽고 코믹해서 너무 빨리 읽어버렸다 젠ㅈ장. 웅 그러니까 이 정신나간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찾아온 환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타민 주사만 맞을 뿐 결국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했는지 결과치는 나오지가 않는데 그건 작가가 이 캐릭터들에게 자유를 부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여기까지 살펴볼테니 "너는 널 구원해. 이만큼 너 얘기를 들여다 봤으니까 됐어 고마워" 뭐 그런 느낌이랄까 암튼 문제 상황은 환자 캐릭터들로 시작이 되었는데 극복은 이라부가 하는 느낌이라 엉뚱하고 어이없어서 특이하게 느껴지면서도 음... 그냥 진짜 너무 ㅋㅋㅋ 즐거웠다. 여러모로 참 사랑스러운 이야기구나 싶었다. 5개의 이야기는 각각의 매력대로 내 마음을 뺏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마지막 챕터 "여류작가"는 너무 내 상황같아서 이입이 되었는데 솔직히 너무 공감돼서 불쾌할 정도였다. 표현의 세기가 나와는 조금 다를 뿐이지 이 챕터에 나오는 밥맛 없는 아이코는 나와 같아서 제발 이번에는 아이코가 성장하는 것 까지 나왔으면 했는데 그래도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보이는 구성이라 그런지 약간은 나왔던게 나한테 많이 와닿았던 것 같다.
~좋았던 구절~
[ 장인의 가발, 180p ]
이라부가 가발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뒤통수 쪽 본래 머리칼이 함께 딸려 올라간다.
"이케짱." 이라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양 옆에 핀이 꽂혀 있는 것 같아. 좀 빼줄래?"
미친놈. 왜 날 끌어들여.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빨리!" 이라부가 재촉했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다쓰로에게로 쏠렸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 여류작가, 266p ]
작가 생활 5년째에 그 책을 썼다. 가족의 붕괴와 재생을 그린 휴먼드라마다. 다리품을 팔아 자료를 구해 읽고, 공들여 취재를 하며 온 힘을 다해 쓴 작품이다. 가벼운 연애소설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영혼을 흔들만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보람은 있었다. 출간하자마자 여러 지면에서 소개했고, 대부분 절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을 안 가리는 사쿠라까지 흥분한 목소리로 "이거 걸작인데!"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코는 충만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그걸로 자신도 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팔리지 않았다.
[ 여류작가, 300p~305p]
"내가 줄곧 응원해온 젊은 감독이 있는데 3년만에 새 영화를 찍었어. 근데 엄청나게 잘 만든 거야. 마니아 취향이 아냐. 독선적인 영화도 아니고. 멋지고 수준도 높은 양질의 오락 작품이라구. 배우도 좋아. 촬영도 잘했고. 시사회에서 난 눈물을 흘렸어. 그래서 엄청 기대를 했지. 이 감독도 이제 대박 나겠다. 드디어 쨍하고 해 뜰 날이 온거구나....... 그랬는데 관객이 안들어. 개봉 첫날 집에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극장으로 나가봤더니 감독하고 프로듓서가 한산한 객석 구석에 앉아 있지 뭐야. 이 일을 어쩌나. 나를 보고도 시선을 못 마주치더라고.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멀찍이 서서 고개만 꾸벅하고 돌아왔어. 감독, 기특하게도 미소를 짓더라구."
아이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라이도 이라부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직 가능성은 있다. 틀림없이 입소문이 퍼질 거리 믿고, 그 후에도 영화관 주변을 맴돌았어. 그런데 여전히 관객이 들질 않아. 제작비가 부족하니 광고할 돈도 없고, 이를 어쩌나 어쩌나 하는 사이, 단 2주 만에 간판 내려버린 신세지. 이런 잔인한 얘기 들어봤어? 이게 일본영화 현실이야. 걸려봐야 애니메이션이나 텔레비전 개작물투성이야. 대기업이 출자해서 인기 탤런트 쓰고 엄청나게 광고비 쏟아 부어 눈먼 돈 빼먹고 뒤로 빠지는 식이지. 이런 같잖은 소리 들어봤냐구?"
목소리가 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기가 센 사쿠라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 감독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냔 말야. 새해 일본 영화잡지 베스트10에 드는 정도는 위로가 되질 못해. 세일즈 실적이 없으면 다음 찬스 같은 건 주어지질 않으니까.감독의 심경을 생각하면 난 당분간 웃을 수도 없어. 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고. 겨우 연출을 의지해 잡지에 홍보하는 정도지.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어. 전화도 못 하겠고. 자포자기 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살짝 물어봤더니 그 사람 날마다 거리를 방황하고 다닌다더군. 어디 갈 만한 데도 없고 사람들도 만나기 싫으니까 혼자서 그냥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만 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렇구나, 좌절하면 모두 방황하게 마련이구나. 아이코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내일>이 팔리지 않아 집에 있는게 싫어서 매일 영화관만 들락거렸다. 갈 만한 곳이 없어 결국엔 후나바시까지 발길을 옮겼다. 멀리 보이는 영화관 스크린을 쳐다보다가 자기가 대체 뭔 짓을 하나 싶어 눈물이 나왔다.
"이 나라에서 영화 일 하는 건 이렇게 한심스러운 노릇이지. 이번에 보답이 없으면 이 사람은 영영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부디 히트시켜 주십시오, 두 손 모아 빌었지만 그래봤자 성공할 확률은 너무 낮아. 나는 그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적어도 나만은 성실하게 일하자, 사기에 가담하는 것만은 피하자, 그리고 겸허한 인간으로 살아가자고....."
아이코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라이도 눈언저리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이라부는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생략)
무너져버릴 거 같은 순간을 앞으로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어제 사쿠라가 한 말이 큰 격려가 되었다. 반성도 했다. 자신의 작은 그릇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심각한 일들에 비하면 작가의 고민 따위는 모래알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사라진대도 상관없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다. 그때그때 한순간만이라도 반짝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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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번년도 3월이 생각난다. 일주일에 촬영 2~3개씩 해가면서 집에 새벽에 들어가면 핸드폰이 울리던 시절이. 사람 도예담은 없고 피디 도예담으로만 살아가던 시절이.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메일 하나만 써달라는 간단한 요청이었는데도 나는 그라데이션 따위는 없는 괴로운 오열을 하면서 컴퓨터를 키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집 앞 24시 카페를 찾아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촬영을 준비하고 문서를 정리하던 시절이.
"안녕하세요 카피님, 아트님, 과장님, 감독님, CD님, 대리님,,,
00000의 도예담 피디입니다
전달주신 피드백 반영하여 최종 수정한 영상 전달 드립니다
확인 후 편하게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도예담 드림"
통화) 음음, "아 안녕하세요 00님 새벽에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수정 피드백이 와서요.. 네 언제부터 있었던 컷인데, 네 고생이 많으셔서 어떡해요. 근데 이거 오늘 아침까지 해달래요.. 어떡하죠 한번만 부탁드릴게요 제가 다른 건은 최대한 미뤄볼게요 일단 이거 먼저 수정 부탁드려요 죄송해요ㅠ"
이런 글과 말들을 내뱉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으며 헤매던 나날들. 나에게 목적은 나 그 자체인데, 목적 없이 움직이려니 고장이 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대로 정지. 왜 영상을 해야되나부터 시작해서 꼭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나는 영상으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뭐 별에 별 생각이 다 나는데 그런 나에게 이 문장은 너무 사기였다. "사라진대도 상관없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다. 그때그때 한순간만이라도 반짝일 수만 있다면."
결국 이 땅의 외로운 사람들과 우울한 사람들과 또 나같은 사람들을 아니, 나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한 순간 빛나는 때를 위해 지금껏 달려온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자질구레 한 것들은 다 신경끄고 어쩌라고 상태로 지내다가 갑자기 또 알 수 없는 벅차오름에 둘러쌓여 홀리듯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겠는가 하는거지.
결론 : 푸들 귀엽다 입에 넣어버릴랑;
